세계한민족공연예술축제 여는 주재근 정효국악문화재단 대표
전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재외 한민족 동포와 예술인들을 초청하는 ‘세계한민족공연예술축제’가 올해도 8월18일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열린다. 이 축제는 지난해 광복절에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 우면당, 남산국악당, 정효아트센터에서 기념식과 초청공연, 축하공연, 강습 등 3박4일 동안 열렸다.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5개국에서 활동 중인 40여 명의 전통예술인들이 참여했다.
‘세계한민족공연예술축제’를 개최해 온 주인공은 정효국악문화재단의 주재근 대표(48)다. 정 대표는 대금연주자이면서 음악이론 교수(박사), 21년간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무원으로 경력을 쌓은 후 현재는 민간예술단체 운영자로 활동하고 있다. 공연현장과 이론, 행정경험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전통문화예술의 대중화를 이루는 데 힘써왔다.
―세계한민족공연예술축제를 기획하게 된 동기는.
―앞으로 세계한민족공연예술축제는 어떻게 발전해나갈 것인가.
한양대 국악과에서 음악인류학 박사학위를 한 그는 문화체육관광부 공연전통예술과, 국립국악원 등에서 문화예술 진흥정책을 담당해 온 공무원으로 21년간 일한 뒤 퇴직, 우리 음악의 대중화를 연구하고 기획하는 이를 해왔다. 그는 정효아트센터에서 국악계 신인연주자들과 원로급 예술인과의 소통의 장을 만드는 한편, 전통음악은 물론 서양의 클래식까지 한국의 공연문화 발전을 목표로 하는 (사)공연전통예술미래연구원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2006년 우리 음악을 외국인이나 시민들에게 어떻게 하면 좀더 친근하게 느끼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때였다. 문득 고종이 100여년 전 주한외교사절들과 연회를 베풀었던 덕수궁 정관헌에서 주한 외국대사와 부인들을 위한 행사를 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런데 보다 많은 주한 외교사절이 오기 위한 유인책이 필요했다. 그때 외국대사와 부인들에게 맞춤 한복을 선물해 주면 모두들 오지 않을까 생각을 했는데 결과는 대박이었다. 독일, 일본 등 40개국 60명의 주한 외교사절이 참여했고 이들은 우리의 전통음악과 궁중무용감상과 사물놀이 체험, 전통차와 다과를 즐기고 마지막 순서로 덕수궁 정전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이날 행사는 당일 저녁 9시 메인뉴스에 중요하게 보도됐다.
―대금 연주자에서 공무원이 된 계기는.
“국립국악고등학교에서 대금 연주자를 꿈꿨다. 그런데 전문적인 대금 연주자로 국립국악원이나 KBS국악관현악단 단원으로 가는 것보다 대학에서는 국악이론을 전공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우리 전통음악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널리 알리는 일이 연주 한번 하는 것 보다 더욱 가치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졸업 후 1994년 교학사 음악편집 담당으로 입사해 교육과정 개편에 따른 중학교 음악교과서를 새롭게 제작하는 임무를 맡았다. 국악 이론을 전공한 사람으로써 서태지와아이들로 대변되는 시대적 감각에 맡는 신선한 국악을 교과서에 넣을 수 있게 돼 마음이 설렜다. 당시 교과서에 국악과 양악의 비율은 10:90 정도였는데 국악비율을 30%까지 끌어 올렸다. 국악대중가요로 인기를 얻고 있던 ‘꽃분네야’, ‘산도깨비’ 등을 작곡자 허락을 직접 받고 국악관련 사진들로 세련된 사진들로 모두 교체했다. 음악교과서의 혁신이라 할 정도로 바꾸었는데 당시 교과서 저자 중 서양악 전공 교수분이 최종본을 보고 왜이리 국악이 많냐며 자기는 승인 못하겠다고 교과서를 바닥에 내팽겨쳐 버렸다. 그 분이 돌아가자마 마자 담당 과장님께 사직서를 내고 화장실에 가서 세상에서 가장 서럽게 울었다. ‘이것이 지금까지 국악을 대하는 우리 사회였구나’ 생각을 하니 모든 전통국악을 하는 사람들이 불쌍해 보였다. 그때 다짐하였던 것이 앞으로 국악이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대접받기 위한 일들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주 대표는 1997년 9월 문화체육관광부 국가공무원 특채로 학예연구사로 임용됐다. 21년 동안 국립민속악원, 국립국악원 국악연구실, 국악진흥과, 장악과, 국립부산국악원 등 공연, 연구, 진흥 등의 국악의 전반적인 일을 맡았다. 그는 “특히 2006~2008년 문화체육관광부 전통예술팀에서의 근무는 국립국악원만이 아닌 국악계와 문화예술계 전반을 살펴보는 계기가 됐다”며 “당시 만들어낸 국악정책과 예산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으며 문화예술정책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동아일보와도 인연이 깊다. 2005년 9월27일자 동아일보에 났던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에 전시됐던 국악기가 발견됐다’는 기사를 보고, 이 국악기를 112년 만에 프랑스에서 고국으로 귀환하는 전시를 기획했다.
―공무원에게는 예산을 따내는 일이 가장 중요한데, 노하우는.
“2018년 10월 국립부산국악원 장악과장으로 근무를 하면서 가장 큰 상을 받았다. 문화체육관광부 전 직원이 매년 투표하여 직급별로 바람직한 관리자상을 선정 수여하는데 2019년에 바람직한 관리자상을 수상한 것이다. 당시 국립부산국악원에서 심각한 현안이 있었는데 계약직 단원 약 30여명이 2년 경과돼 정규직 전환을 요구한 것이다. 문제를 푸는 방법은 두가지였다. 내가 있을 때 위반한 것이 아니니 그냥 시간끌기 하다 서울로 발령받아 가는 것, 아니면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와 같이 절대적으로 어려운 것이었다. A안, B안등을 마련해 우선 개인적으로 아는 변호사에게 상담을 하여 법적 검토를 끝내고 실행에 들어갔다. 기획재정부와 문화체육관광부가 있는 세종시를 부산에서 하루가 멀다 찾아가고 기획재정부 담당자 카톡으로 매일 같이 메시지를 남겼다. 부산의 오늘 날씨가 어떻고, 재미있는 콩트도 보내고 스토커처럼 매달렸다. 그리고 해당되는 단원들을 앞세워 기획재정부로 찾아가 눈물로 절박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2018년 말 기획재정부 담당자에게 카톡이 왔다. 국립부산국악원 단원 15명 증원하기로 했다는 문자였다. 그대로 심장은 멈추었고 눈물은 하염없이 흘렀다. 정말 세상은 노력하면 안되는 것이 없구나 라는 인생의 진리를 새삼 알게 됐다.”
―대금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전남 여수의 시골 마을 여선생님 자취방에서 본 베토벤 석고 두상은 아직도 내 인생의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한 학년에 30명 남짓의 한 반밖에 없는 전교생 300여명의 아주 작은 초등학교로 첫 부임한 여선생님은 시골 어린이들에게 연극과 리코더를 가르쳤다. 수많은 별빛이 고요하게 출렁거리는 여수 밤바다 앞에서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등 리코더 합주단의 연습은 각종 대회에서 상으로 이어졌다. 초등학교 6학년때 서울로 전학을 오게 된 뒤 낯설음을 적응하는데도 리코더가 제격이었다. 쉬는 시간 교실 한편에서 시작된 리코더 연주는 장기자랑 때마다 단골로 불려졌고 그 인기는 중학교까지 이어졌다. 당시 진로는 국사 선생님이 되는 것이 목표였는데 음악선생님이 국립국악고등학교 진학을 권해주었다. 국악이라는 거부감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일반 인문계고등학교 보다는 예술계 고등학교에서 즐겁게 청춘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국립국악고등학교가 학비도 없고, 매월 장학금을 준다는 것은 매력적이었다. 입학 후 전공 악기 선택을 하게 되는데 가야금 거문고 등 현악기는 관심이 전혀 없었고 작은 피리 보다는 가로로 비켜 부는 커다란 대금이 근사해 보였다. 대금을 전공으로 선택하고 선배들의 궁중음악부터 민간의 산조음악까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음악들은 클래식이나 가요와는 다른 묘한 매력적인 음악으로 청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세계한민족예술축제를 기획하게 된 데 대해 대학에서 국악학을 전공하면서 해외의 음악교류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국악학의 세계를 가르쳐주신 권오성 교수님은 국악만이 아닌 서양음악학, 인류학, 종교학, 민속학, 언어학 등으로 사고를 넓고 깊게 해 주었다. 제자는 스승이 가는 길을 뒤따르는 경우가 많은데 은사이신 권 교수님은 중국, 일본, 몽골,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들의 음악의 학문적 교류에 이바지하신 분이다. 교수님의 해외 출장이나 세미나, 뒷풀이 자리에서 세계 여러나라의 음악가와 학자들과의 만남은 국제음악교류의 필요성과 안목을 키우게 되었다.”
―가장 안정된 직장으로 꼽히는 공무원은 왜 그만두었나.
“2019년 강사법이 통과되자 출강하고 있던 이화여대 한국음악과에서 겸임교수는 9시간 이상 맡아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공무원 규정상 4시간 이상 외부출강은 금지돼 있었다. 오랜 고민 끝에 21년간의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이제는 사회에서 뜻을 실행하는 시점이라 생각됐다. 2019년 4월30일자로 명예퇴직하고 5월1일자로 민간 최초 국악문화재단인 정효국악문화재단 대표 이사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침체 위기의 정효국악문화재단이 지금은 여러 기획공연으로 화제의 중심이 되고 있다. 2020년부터는 국내 최고 권위의 동아국악콩루르가 열리는 장소가 됐다. 앞으로도 여러 기관과 협업하는 문화재단을 지향하고 있다. 2학기부터는 이화여대 초빙교수 외에 한양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로 공연기획론, 홍보마케팅론, 국악학연구방법론, 국악사특강, 국악문헌특강등 여러 강의를 맡고 있다. 국악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이 사회경험을 쌓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고 공연문화예술정책 마련 및 대안 제시를 위한 사단법인을 지난해 7월에 설립했다.”주 대표는 올해 5월부터는 문화재청 무형문화재전문위원과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국제교류자문위원, 서울시남산국악당 예술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엘리트 체육에서 생활체육으로 정책이 변함으로써 체육이 활성화 됐듯이 ‘엘리트 음악에서 생활음악으로’라는 모토를 내건 ‘대한민국생활음악축제’를 계획하고 있다”며 “21년간의 문화예술행정경험을 바탕으로 국가문화브랜드 상승과 온 국민에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문화예술정책 개발 및 활용, 그리고 지역의 균형적 문화발전에 모든 힘을 쏟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한 “음악의 강국인 우리나라에 아직 국립음악박물관이 없는 것이 아쉽다”며 국립음악박물관 건립 추진에 대한 필요성도 제기했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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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8, 2020 at 10:24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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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없던 조선 떠나 100년 넘게 우리 춤, 우리노래 지켜온 예술가들[전승훈 기자의 도시산책]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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