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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예술가의 사회] 좌익·우익에게 이용당하고 역사에서 사라진 화가 - 매일경제 -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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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가 자신을 그린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1940년대).
사진설명이쾌대가 자신을 그린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1940년대).
6·25전쟁 이후 수십 년 동안 대한민국에서 `월북`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금기였다. 반공을 시대정신으로 삼은 엄혹한 정권하에서 북쪽으로 넘어간 시인의 시를 읊었다가는 고초를 치를 수도 있었다. 이 금기가 해제된 건 1988년이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월북 예술가 작품에 대해 해금 조치를 내렸다. 일제 식민지 시대와 해방 직후 활동했던 예술가들이 대거 부활했다.

그들 중엔 화가 이쾌대도 있었다. 이쾌대 작품 수십 점이 공개됐다. 대부분 인물화였다. 저고리를 입은 여인부터 부랑자를 그린 그림까지 있었다. 모두 조선의 얼굴들이었다. 그림과 함께 화가의 삶도 알려졌다.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해방과 전쟁을 겪은 세대답게 이쾌대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파도가 많은 인생의 끝은 대부분 슬픔으로 끝난다. 이쾌대의 인생도 그랬다.

서양화 기술로 조선의 얼굴을 그리다


이쾌대는 1913년 경상북도 칠곡에서 태어났다. 대지주 가문에서 태어난 이쾌대는 평화로운 유년을 보냈다. 이쾌대 집안은 벼슬을 이어온 명문 가문이었다. 집 분위기는 딱딱하지 않았다. 일찍 개화사상과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개방적인 가풍 덕에 신식 교육을 받은 이쾌대는 전형적인 모던보이였다. 이쾌대는 서울 휘문고(당시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그를 회화의 세계로 이끈 인물은 화가이기도 했던 휘문고 교사였다. 그는 제자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림을 가르쳤다. 이쾌대는 화가 등용문이었던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할 만큼 두각을 드러냈다. 휘문고를 졸업할 때쯤 이쾌대는 유갑봉이란 여성과 결혼했다. 부부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쾌대는 도쿄 무사시노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서양화 기술을 흡수했다. 미켈란젤로처럼 해부학적인 지식을 습득해 정확한 비례에 따라 사람을 묘사했다. 이쾌대는 인물화에 매달렸다. 서양화 기술을 익힌 이쾌대의 그림은 당시 조선 화가들의 인물화와는 달랐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의 작품처럼 이쾌대가 그린 인물들은 선이 굵고, 선명하고, 정확하고, 비장했다. 이 시기에 그린 작품 `운명`(1938)으로 일본 유명 공모전에서 입선하며 이름을 알렸다. `운명`은 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숨을 거두자 그를 둘러싼 네 명의 여인이 비탄에 잠긴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서양화 단골 주제인 예수의 죽음을 다룬 그림을 떠올리게 하는 구도다. 이쾌대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운명이 이 그림 속 기운과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가리라고는.

이쾌대에겐 열두 살 많은 형 이여성이 있었다. 이여성도 이쾌대처럼 화가였다. 동시에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다. 아버지 땅문서를 몰래 팔아 독립군에게 자금을 댈 정도로 항일에 깊게 관여했다. 3·1운동 직후 대구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적발돼 3년간 복역도 했다. 이여성은 사회주의자였고, 좌익단체에서 활동했다.

형의 영향을 받은 이쾌대 역시 그림만 그린 화가는 아니었다. 유학 시절 이쾌대는 일본에 있는 한국 화가들을 모아 조선신미술가협회라는 조직을 세운다. 조직의 목적은 분명했다. `조선의 미감을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 민족미술 부흥을 목적으로 한 단체였다. 회원 중에는 이중섭도 있었다. 이쾌대는 1941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조선신미술가협회 소속 화가들과 활발하게 전시회를 개최하며 이름을 알렸다.

좌익, 우익 모두에게 이용당한 이쾌대

1945년 8월, 해방은 벼락같이 찾아왔다. 혈기왕성한 30대 화가 이쾌대의 가슴은 솟구쳤다. 무엇이든 이룰 수 있으리라는 설렘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해방 직후 이쾌대가 그린 자화상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에는 젊은 화가의 결연함이 들어 있다. 파란색 두루마기를 입은 이쾌대가 부릅뜬 눈으로 정면을 쳐다본다. 굵은 눈썹, 두꺼운 입술, 우람한 팔뚝을 가진 이 남자에게서 옳음을 위해 목숨까지 내던지는 선비의 기개가 느껴진다.

이쾌대는 해방 이후 좌익 미술단체에 가담했지만, 곧 회의를 느꼈다. 스탈린 초상화 그리기에 매달리는 선전미술을 따르기 어려웠다. 이쾌대는 이데올로기와 거리를 뒀다. 그 대신 이 땅에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그렸다. 하지만 좌익, 우익 양쪽 모두 이쾌대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1949년 이승만정부는 이쾌대를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보도연맹이란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전향시키려는 취지로 만들어진 단체다. 보도연맹에 속한 이쾌대는 강제로 반공 포스터 그림을 그려야 했다. 1년 후 6·25전쟁이 터졌다. 어머니 병환 때문에 이쾌대는 피란을 떠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았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이번엔 좌익 세력이 이쾌대에게 사상 전향을 강요했다. 이쾌대는 살아남아야 했다. 그는 북한군 명령에 따라 다시 스탈린, 김일성 초상화를 그렸다. 전세는 역전됐고 연합군은 서울을 탈환했다. 그 사이 이쾌대는 좌익세력으로 분류됐고 국군에 체포돼 포로수용소에 갇혔다. 휴전 협정 후 포로들은 남한과 북한 중 어디로 갈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이쾌대는 북한을 선택했다.

"나의 그림을 팔아 아이들을 먹이시오."

이쾌대는 포로수용소에 있을 때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껴둔 나의 채색 등 하나씩 처분할 수 있는 대로 처분하시오. 그리고 책, 책상, 흰 캔버스, 그림들도 돈으로 바꾸어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주시오. 전운이 사라져서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때는 또 그때대로 생활 설계를 새로 꾸며 봅시다. 내 마음은 지금 안방에 우리 집 식구들과 모여 앉아 있는 것 같습니다." 이쾌대는 자신도 포로수용소에 있으면서 가족들이 굶주리지 않을까 걱정해 그림을 팔라고 했다.

가족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뒤로하고 이쾌대가 월북한 이유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가늠할 수는 있다. 그의 형 이여성은 이미 월북해서 북한 정권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쾌대가 남한을 선택하면 `빨갱이` 딱지를 달고 살아야 했다. 또한 그는 분단은 잠깐이며, 곧 가족과 재회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유갑봉은 남편의 부탁을 무시했다. 이쾌대가 그림을 팔아 생계에 보태라고 했지만, 그는 남편의 작품을 소중히 간직했다. `월북 화가 가족`이라는 주홍글씨를 견디면서도 남편이 돌아올 날을 학수고대했다. 악착같이 포목점을 운영하며 가족을 먹여살렸다. 1980년 유갑봉은 남편과 재회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1988년 월북 작가 해금 이후 이쾌대의 자녀들은 어머니가 간직한 아버지의 그림 수십 점을 공개했다. 무언가를 바꿔보려는 열정으로 가득했던 화가의 그림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그 그림을 그린 화가의 쓰라린 삶과 함께.

[조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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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07, 2020 at 06:01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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