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메이커 김강호 기자] 가느다란 팔다리와 몸을 가진 조각들이 굉장히 흥미롭다. 보통 조각하면 미켈란젤로나 로댕의 꿈틀거리는듯한 생생한 육체를 표현한 조각이 떠오를 텐데, 이 조각상들은 너무나 앙상하고 얇다. 하지만 뭔가 모를 힘이 느껴진다. 작품은 미켈란젤로와 로댕을 잇는 또 하나의 거장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가 만든 것이다.
천재 화가를 꼽는다면 대부분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를 떠올릴 것이다. 천재적인 예술 재능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제2의 피카소다', '피카소가 살아났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천재의 대명사였던 그 피카소도 한 예술가를 질투했다. 피카소가 유일하게 질투했던 그가 바로 자코메티였다.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기반을 다져간 예술 사상
자코메티는 스위스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는 아버지인 조반니 자코메티가 유명한 인상파 화가였기에 자연스럽게 예술가의 길을 걸었다. 주네브 미술 학교에서 조각을 공부했으며, 1922년에는 파리에 가서 오귀스트 로댕의 제자였던 앙투안 부르델의 제자가 되어 공부했다. 그래서인지 자코메티도 로댕의 영향을 받았고, 그의 후계자라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자코메티의 예술은 로댕과도 분명 구분됐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것에 대한 조형을 포기했다. 대신 상상력에 의존한 작품 활동을 1925년부터 시작하게 된다. 또한 그는 조각가 브랑쿠시, 자크 립시츠 그리고 철학자 사르트르와 피카소와도 교류하면서 큐비즘,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초현실주의에 오래 있지 않았다. 그는 점점 인간의 나약함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환상의 세계를 표현한 초현실주의와 멀어졌다. 그리고 초현실주의 모임에서도 탈퇴했다. 대신 인간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는 실존주의에 몸을 담그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르트르가 그의 실존 철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자코메티는 나치에 점령당한 파리를 떠나 제네바로 갔다. 전쟁의 혹독함을 몸소 체험한 그는 더욱더 인간과 인생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종전 후에 다시 돌아온 자코메티는 그렇게 본격적으로 그의 독특한 예술을 시작했다.
고통스런 삶의 표현이 녹아있는 조각들
그는 이때부터 가느다란 조각 작품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곧 그 작품들이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1947년 제작한 '가리키는 남자'는 높이 약 178cm이며, 청동을 조각해 만들었다. 팔다리와 몸통, 얼굴은 앙상하지만 울퉁불퉁한 그 표면의 표현은 매우 생생하게 느껴진다.
1961년에 제작한 '걷는 남자'는 높이 약 183cm의 청동 조각상이다. 역시 조각된 인물의 모습은 철사 마냥 가늘고 앙상하다. 이것으로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을까. 자코메티는 수많은 동료 예술가와의 교류 및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 그런데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계기가 있었다. 21살에 겪은 한 사건이었다.
1921년 자코메티는 이탈리아로 여행하던 도중, 네덜란드인 노신사를 만났다. 이후 그 노신사가 신문의 광고로 자신을 찾았고 자코메티가 그를 찾아갔다. 노신사는 자신이 경비를 부담할 테니, 함께 여행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여행을 승낙한 자코메티는 그와 여행을 떠났으나, 여행 도중 노신사는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갑작스런 죽음과 비극을 겪은 그는 어떤 것도 영원할 수 없다는 것, 세상은 고통스럽고 무력하다는 것을 느끼고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다. 하지만 이내 그것을 자신의 예술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됐다. 앙상한 조각들을 통해 자코메티는 죽음을 표현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 속에서 걸어나오는 생명의 강렬함과 숭고함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걷는다. 나는 걸어야만 한다.
숭고한 인간이든, 고독한 인간이든 모두 걷는다.
이 세상에 내던져진 이상 누구나 걷고, 걸을 수밖에 없다.
종착점이 어떤 풍경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그곳으로 가야 한다"
자코메티가 남긴 이말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말이다.
이후, '걷는 남자'는 2010년 소더비 런던의 경매에서 6500만 파운드(1067억 3000만)에 팔리며,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 작품의 기록을 갱신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그다음 2015년에 '가리키는 남자'가 뉴욕 크리스티에서 1549억이라는 가격으로 낙찰되어 자신의 기록을 다시 갱신했다는 것이다.
자코메티의 재능을 질투한 피카소
그렇다면 피카소는 왜 자코메티를 질투했던 것일까? 원래 피카소와 자코메티는 동료였다. 자코메티는 30살에 피카소를 만나 수십 년을 교류했다. 처음에 피카소는 자코메티의 조각이 매우 참신하고 새로운 시도였다는 것을 인정했다. 또한 서로의 작업장을 수시로 들리며 서로가 조언을 해주었다.
하지만 점차 둘은 가치관에서 이견을 드러냈다. 피카소는 그의 재능을 매우 시기했다고 한다. 반대로 자코메티는 피카소의 거만함과 화려함을 싫어했다. 피카소는 자코메티의 예술이 범위가 좁고 비슷하다고 비판했고, 자코메티는 반대로 "피카소는 작품에 근본적인 진리를 담지 못한다. 말하자면 피카소는 예술가가 아닌 천재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심지어 피카소는 자신이 소속된 갤러리에서 자코메티를 영입하려고 하는 것을 극렬히 반대하여 무산시킨 적도 있었다. 자코메티와 피카소는 결국 1951년에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피카소는 말년에 많은 부를 누렸으나, 자코메티는 생전에 경제적으로 크게 성공하지 못했으며, 평생을 8평 작업장에서 묵묵히 작업만 했다.
93세까지 장수했던 피카소는 자코메티가 그보다 20살이나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코메티 사후에도 7년을 더 살았다. 죽음이 가까워 온 피카소는 의외로 보고 싶은 사람으로 자코메티를 꼽았다고 한다. 비록 많은 갈등을 겪었으나, 오랫동안 함께한 우정을 그리워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현대에 자코메티의 작품이 피카소 작품을 뛰어넘어 경매가를 갱신하는 것을 보면, 라이벌 관계는 그들의 사후에도 계속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자코메티의 걷는 남자는 주물을 이용해서 이미 같은 여러 점이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걷는 남자 이전에 그의 작품 중 최고가는 불과 2년 전인 2008년에 '서있는 여인'이 288억 원에 낙찰된 것뿐이었다.
어떻게 갑자기 그의 작품이 그중에서도 희소하지도 않은 것이 예술 작품 최고의 경매가를 갱신했을까? 그의 예술의 세계가 이제서야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은 것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자코메티는 '나는 예술에 관심이 있지만, 진리에 더 관심이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작품에 자신이 생각하는 인간에 대한 탐구와 얻어낸 진리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인간이 두 번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이 세상이 진실해질 수 있을까라고도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기에 인간은 불완전한 것이다. 그리고 한 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왜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의 작품을 보면서, 우리는 불완전한 삶을 넘어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July 21, 2020 at 11:45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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